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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12-12 10:49
[조선시대 핫 플레이스, 강원의 명소는 지금]꾸밈 없이 그대로 공작산이 품은 무위자연
 글쓴이 : 수타사종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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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수타사 용연 , 대적광전, 조담, 눈 내린 경내, 삼층석탑.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 조선 선조때 현재 자리로 옮겨

여러번 중수 과정에도 옛 모습 그대로 절제美 돋보여
용연·조담·삼담오탕 빼어난 풍광 담은 한시도 전해져


수타사탐방안내소를 지나자 갑자기 깊은 숲속이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사찰의 역사를 말해준다. 노송보다 더 오래된 부도가 숲속 깊은 곳에 자연스럽다. 홍우당 스님의 부도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부도탑 형태다. 숲을 지나자 느닷없이 `조담(槽潭)'이 눈에 들어온다. `조(槽)'는 `구유'를 뜻하는 한자다. 가축의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을 `구유'라고 하며, `구유통'이라고도 한다. 절벽 밑으로 물이 길게 고인 모양이 구유통 같다. 선인들은 그 모양을 보고 `조담'이라 불렀다. 한원진(韓元震·1682∼1751년)은 1727년에 `봄에 수타사에 유람 갔다가 조담과 용연을 보다'란 시를 짓는다.

수타사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용연(龍淵) 때문이다. 너럭바위 가운데를 뚫고 물이 세차게 떨어지며 깊은 못, 용연을 만들었다. 물이 떨어지는 `水墮' 곳에 절이 들어서서 수타사다. 용은 비구름을 관장하는 동물이다. 가뭄이 들면 용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빌었다. 용연은 용추(龍湫)라고도 했다. 홍천 현감이었던 안중관(安重觀)은 `수타사 용추에서 비 내리기를 바라는 제문'을 지어서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수타사 용추는 영험한 곳이었다. 이항로(李恒老·1792∼1868년)는 용담(龍潭)이라고 하였다.

수타사 산소길은 수타사 인근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수타사 인근 신봉마을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 홍천 읍내까지 왕래하곤 했다. 잠시 걷다 보면 절경인 `소'에 닿는다. 소는 여물통을 일컫는 강원도 사투리로, 통나무를 파서 만든 여물통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김상정(金相定·1722~1788년)은 한여름에 홍천에 왔다가 삼담오탕(三潭五湯)을 구경하고 `다섯 개의 물 웅덩이(五湯)'를 시로 읊었다.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708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창건 당시는 일월사(日月寺)라고 했다. 조선 선조 2년(15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며 수타사(水墮寺)로 이름을 바꿨다. 순조 11년인 1811년엔 수타사(壽陀寺)로 바꾼다. 그럴듯한 전설이 전해진다. 용연에서 매년 승려가 빠져 죽는 사고가 발생하자, 발음은 같으면서 뜻은 목숨을 뜻하는 `수(壽)'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무량한 수명을 상징한다는 설명도 전해진다. 박윤묵(朴允默·1771~1849년)은 개명한 이후에 편액을 썼다. 졸렬한 글씨로 절을 더럽혔다고 겸손하게 표현했으나, 졸렬하기보단 소박(素樸)하고 고졸(古拙)하다. 소박이란 원래 가공되지 않은 사물의 원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교가 가미되지 아니한 자연스러움을 뜻한다. 도덕경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이 떠오른다. 대교약졸은 인위적 기교가 아닌 자연을 본받아 이루어지는 최고의 단계다. 수타사 경내가 모두 `대교약졸'이다. 지나치게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다. 흥회루는 몇 번의 중수 과정을 거쳤지만, 옛 모습을 여전히 품고 있다. 옷을 꿰맨 것 같지만 결코 누추하게 보이지 않는다. 편액에서 볼 수 있는 고졸의 미를 심우산방과 좌측의 요사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적광전은 크지 않지만 정연한 짜임새와 높은 완성도로 조화와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단아한 모습이다. 지나치게 크지 않아서 위압감을 주지 않지만,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이천보(李天輔·1698~1761년)는 “덩굴 뚫고 십 리 말 달려, 한밤 책상에서 게송을 듣는데, 오래된 벽은 뚫어져 달을 머금고, 차가운 종소리 멀리 서리를 맞네”라고 노래했다. 수타사를 노래한 한시는 사찰을 노래한 것도 있지만 수타사 주변의 승경을 읊은 것도 있다. 조담, 용연, 삼담오탕 등이 대표적이다. 주변의 풍광을 노래한 한시를 통해 수타사는 문화적인 요소와 경관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룬 공간임을 알려준다.

건너편에 있는 삼층석탑은 못 보고 지나치기 일쑤다. 삼층석탑 일대가 수타사의 전신인 일월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의 수타사에 앞서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시대에 운영된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편집=김형기기자